여행기 · 2026-04-27

[기행] 봄볕 따라 떠난 칠곡 구상문학관과 가산산성 나들이

1. 봄날, 밀양에서 칠곡으로

연둣빛 새순이 앞다투어 기지개를 켜고, 포근한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눈부신 계절이다. 산천초목이 저마다의 색깔로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이 화창한 봄날, 밀양문인협회 18명의 문우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밀양 오리배 선착장에서 힘차게 출발하였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봄 풍경을 길동무 삼아 도착한 첫 목적지는 낙동강 푸른 물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구상 시인의 고결한 숨결이 머무는 경북 칠곡의 '구상문학관'이다.

2. 관수재, 껌종이에 새긴 은빛 그리움

문학관 입구에 들어서니 시인의 거처였던 '관수재(觀水齋)'가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강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구상 시인은 이곳 툇마루에 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을 관조하였다. 전시실 내부에는 시인이 생전에 받았던 위촉장과 훈장, 그리고 수만 권의 장서가 빼곡한 서재가 정갈하게 놓여 있어 지식의 바다를 유영하던 노시인의 곧은 생애를 증언한다.

저서가 40권이었으나 더 많은 책발간이 있을거라 당번선생님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번 기행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흔든 것은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과 너무나 아름다운 우정이다. 화가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 자녀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채 가난과 병마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배표 한 장 살 돈이 없던 화공은 껌종이 은박지에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았고, 그 절박했던 사랑은 훗날 14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경매가를 기록하며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이 광경을 보았을 중섭 형님은 특유의 해학으로 “구상아, 우리 그때 그거 팔 걸 그랬나?” 하며 늦은 농담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14억이라는 숫자는 강물 위로 흩어지고, 우리가 목격한 것은 오직 <K의 가족> 그림 속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맺힌 아이들의 웃음소리뿐이다. 낱낱이 훑어 담은 그 오붓한 재잘거림은 지독한 가난조차 꺾지 못한 숭고한 생명력이었다.

식사 후 동명지 생태공원을 돌아 시원한 물바람에 마음을 씻고 다음 코스 가산산성으로 이어졌다.

3. 가산산성, 돌 하나에 깃든 호국의 숨결

이어지는 여정은 해발 900m 고지에 우뚝 솟은 역사의 현장, 가산산성이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겪은 후, 국방의 소중함을 절감하며 인조 시대부터 숙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년에 걸쳐 축성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특히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내성, 중성, 외성을 모두 갖춘 삼중성 구조로 이루어져 그 규모와 견고함이 남다르다.

험준한 지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벽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전란의 아픔을 묵묵히 견디며 영남대로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돌 하나하나를 만져보니, 거친 바위 사이에 깃든 조상들의 호국 정신과 고단했던 땀방울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역사의 숨결이 서늘하면서도 경건하게 다가오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문학의 눈으로 과거를 읽고 현재를 기록하는 시간을 가졌다.

4. 시호재, 때를 만난 정원에서 나누는 차 한 잔

역사의 성벽을 내려와 닿은 곳은 마음의 휴식처, '시호재(時乎齋)'이다. 이곳은 자연과 건축의 조화가 빼어나 2005년 '올해의 정원상'을 수상할 만큼 아름다운 조경을 자랑하는 명소이다. '때를 만난 집' 혹은 '때를 아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잘 가꾸어진 정원의 꽃과 나무들은 봄의 정점을 만끽하며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기업 경영의 규모를 연상케 할 만큼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게 관리된 이 공간은, 건축물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떻게 풍경의 일부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품격 있는 정원 한편에서 18명의 문우와 마주 앉아 향긋한 차를 마시며 나눈 담소는 이번 기행의 백미였다. 테코레이션이 예쁜 빵의 풍미와 차 한 잔의 온기는 문학적 허기를 채워주기에 충분하였고, 우리는 마치 구상과 이중섭, 또 다른 문우들이 관수재에서 나누던 뜨거운 우정을 재현하듯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갔다.

5. 여정을 마치며: 14억보다 무거운 온기

함께 간 문우들의 환한 미소가 담긴 사진들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칠곡의 호수' 시비 앞에서도, 가산산성의 웅장한 성벽 위에서도, 그리고 시호재의 푸른 정원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문학의 씨앗을 소중히 심었다. 누구는 껌종이 은박지에서 가난을 보고, 누구는 오래된 성벽에서 역사를 읽으며, 또 누구는 정원의 꽃잎에서 시를 길어 올린다.

18명의 각기 다른 시선이 모여 풍성했던 이번 칠곡 기행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봄날의 선물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들 등 뒤로 바람의 소풍이 기분 좋게 따라붙었다. 14억이라는 가치보다 더 무거운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온기이자, 지키지 못한 약속마저 예술로 승화시킨 사랑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귀한 시간이었다.

칠곡의 산천에 뿌려둔 우리 밀양문인협회의 웃음소리가 낙동강 물결을 따라 멀리 흘러간다. 이번 여정의 기억은 껌종이에 새겨진 은빛 그리움처럼, 그리고 가산산성의 단단한 성벽처럼 우리 가슴 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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