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말문을 틔우다/박서현
산의 등줄기 하나 말문을 쏘아 올렸다
푸른 속내를 묶은 야생란 한 포기
집으로 데려왔다
옮겨심은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두었어
몸을 낮춘 베란다에서
햇살 몇 조각 들락거릴 때마다
동면의 기도가 옆구리를 간질였을까
시간의 안쪽
땅을 밀고 무릎을 세운
종아리는 누가 뽑아 올렸을까
환히 놀랐어
누추한 잎과 잎 사이
차가운 기억들 흐려지고
겨드랑이로 쏘아 올린 연록의 문장
말문을 틔웠어
게으른 밥으로
때론 소나기로 밥을 주었지만
하늘 측면으로
물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던 것을
밤마다 잦은 기침으로
기다림은
성호를 그었어
멈췄던 숨이 한 발짝
푸르른 한 줄 난 뻗어 나갔다
[에세이] 베란다에서 건져 올린 연록의 문장, 「푸른 말문을 틔우다」
산의 꼿꼿한 등줄기를 닮은 야생란 한 포기를 집으로 들여온 날이 있었습니다. 야생의 숨결을 머금은 그 '푸른 속내'를 좁은 화분에 옮겨 심고, 베란다 구석 볕이 잘 드는 물자리에 가만히 밀어 두었지요. 그것은 단순히 식물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한구석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문장 하나를 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도시의 베란다는 산에 비하면 참으로 낮고 누추합니다. 그 좁은 틈으로 햇살 몇 조각이 들락거릴 때마다, 나는 화분 속 깊은 잠을 자는 난의 안부를 살폈습니다. 차가운 흙 속에서 누가 저 가느다란 종아리를 밀어 올리는 걸까. 보이지 않는 시간의 안쪽에서 난은 스스로 무릎을 세우며 '동면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나 봅니다.
가끔은 게으른 밥(물)으로, 때로는 무심한 소나기처럼 밥을 주며 지켜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잎과 잎 사이, 그 비좁은 틈을 비집고 연록의 빛이 쏘아 올려졌습니다. 순간, 환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난이 내뱉은 생의 첫 마디이자, 오랫동안 가슴속에 고여 있던 나의 차가운 기억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따스한 '말문'이었습니다.
밤마다 잦은 기침을 하며 무언가를 기다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멈췄던 숨이 한 발짝 내디딜 때, 난의 겨드랑이 사이로 뻗어 나간 그 푸르른 한 줄은 곧 나에게 건네는 위로였습니다. "이제 됐어, 너도 네 안의 문장을 틔워도 좋아"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지요.
난을 키우는 일은 결국 나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물의 숨소리가 새어 나오던 그 고요한 투쟁 끝에 터져 나온 연록의 문장들. 오늘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오랜 기다림 끝에 기어이 뻗어 나갈 '푸른 말문' 하나가 싹트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