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둥지/박서현
잔가지에 겹겹 봄들이 부딪쳤어
햇살을 들이키며 감꽃 피어났을까
시골장 이야기꾼의
시간과 묵은 시간을 덧댔어
객주를 모셔올 즈음
창문을 열고 구불길이 콜록거렸어
안동을 지나는데 어둠이 몰려왔어
타들어 간 마늘냄새
간고등어 그을린 불냄새
하회탈은 연신 잔기침을 토해냈어
어머니 땅 꺼지는 소리
그을음이 나의 목울대를 막았어
재만 남기고
형체조차 지운 검은 손
옆구리에 라일락을 심어야 해, 한숨 쉬어 가도록
잿더미 안팎에는 표정이 없었어
산, 산이 연필 끝에
빈 페이지 하나 걸어 두었어
문학관 연계 시인노트
시인 노트
이 시는 의성에서 청송으로 이어진 산불 피해 현장을 '객주 문학관 기행' 중 마주한 참혹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설 「객주」 속 감꽃은 배고픔을 견디는 상징으로 쓰였듯, ‘감꽃 피어났을까’는 삶의 조심스러운 회복을 묻는 말입니다.
불타버린 친구의 집터에 라일락을 심는다는 말은, 라일락의 꽃말인 사랑과 위로를 담아 전하는 저만의 애도 방식입니다.
재가 된 시간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야 하기에, 저는 연필 끝에 빈 페이지 하나를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시인 노트] 잿더미 위에 쓰는 푸른 위로의 서사
1. 폐허에서 마주한 '검은 손'의 흔적
의성에서 청송으로 이어지는 길, 소설 『객주』의 숨결을 찾아 떠난 문학 기행은 예기치 못한 비극의 현장과 마주하며 멈춰 섰습니다. 화마(火魔)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단순히 산이 타버린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생이었고, 대대로 이어온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형체를 지워버린 그 '검은 손' 앞에서 시 장수들의 구불길은 콜록거렸고, 안동을 지나온 어둠은 타버린 마늘 냄새와 간고등어의 비릿한 그을음으로 제 목울대를 막아 세웠습니다.
2. 감꽃의 허기와 라일락의 위로
소설 『객주』 속에서 감꽃은 배고픔을 견디게 하던 눈물겨운 상징이었습니다. 제가 시 속에서 "감꽃 피어났을까"라고 묻는 것은, 그 참혹한 폐허 속에서도 삶의 미세한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는지를 묻는 간절한 안부였습니다. 불 꺼진 둥지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땅 꺼지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친구의 타버린 집터 옆구리에 '라일락'을 심기로 했습니다.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가 그 살벌한 잿더미의 기억을 덮어주길, 그리하여 상처 입은 이들이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기를 바라는 저만의 애도 방식이었습니다.
3. 빈 페이지, 다시 시작될 푸른 기록
불길은 모든 것을 태워 아무런 표정도 남지 않은 잿더미를 만들었지만, 시인은 그 절망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빈 페이지'를 발견합니다. 다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이제 그 위에는 다시는 불에 타지 않을 푸른 산의 역사를 새로 써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필 끝에 남겨둔 그 한 페이지는 포기가 아닌, 회복을 향한 장엄한 선언입니다. 재가 된 시간 속에서도 기어이 새순은 돋아날 것이기에, 저는 오늘도 그 빈 페이지 위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