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2026-03-10

호리병의 바다

호리병의 바다

​

‘s-트레인’은 빗줄기에 미끄러진다

​

기차 선로의 s일까?

나는 아직 플랫폼에 서 있고

손안의 라떼가 바다로 밀려든다

​

사천 대방진 굴항

가물거리는 호리병 속 임진년

거북선을 거슬러 오른 사람들이

해 뜨는 곳을 조각 낸 명량

​

왜가리 뼈를 꺼낸 몸 밖에서

긴 부리까지 찢어버린

그는

수초의 이마에서 잠잠하게 서 있다

​

벼랑과 벼랑을 도려 낸 대방마을 돌담길

모래 흘러내리는 벽은

오분 전의

어깨 앞에서 호리병의 바다로 솟구친다

​

[에세이] 호리병 속에 갇힌 시간, 명량의 파동을 깨우다

​

박서현 시인의 「호리병의 바다」는 남도해양열차(S-train)라는 현대적 이동 수단에서 시작해, 사천 대방진굴항이라는 역사의 심연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감각적인 여정을 보여줍니다. 빗줄기에 미끄러지는 기차의 궤적은 단순히 선로 위의 'S'자가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로, 혹은 육지에서 바다로 흐르는 유연한 의식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플랫폼에 서서 손안의 라떼가 바다로 밀려드는 찰나를 포착하며, 일상의 안온함이 거대한 역사의 파도와 맞닿는 지점을 예리하게 찾아냅니다.

​

사천 대방진굴항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숨겼던 호리병 모양의 인공 항구입니다. 시인은 이 지형적 특성을 '호리병 속 임진년'이라 명명하며, 좁은 입구를 통과해 넓은 바다로 솟구쳤던 명량의 기개를 소환합니다. 해 뜨는 곳을 조각내며 나아갔던 사람들의 결연함은, 이제 왜가리의 뼈를 꺼내어 몸 밖으로 밀어내는 고독한 '그'의 모습으로 변주됩니다. 여기서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일 수도, 혹은 그 길 위에서 자신을 대면하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수초의 이마에서 잠잠하게 서 있는 왜가리의 모습은, 격정적인 역사를 품고 있으나 겉으로는 지극히 고요한 굴항의 풍경을 투영합니다.

​

벼랑을 도려내어 만든 대방마을의 돌담길은 시간이 퇴적된 벽입니다.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그 벽 앞에서 시인은 시간의 왜곡을 경험합니다. '오분 전의 어깨'가 현재의 시공간을 넘어 '호리병의 바다'로 솟구치는 순간, 과거의 명량과 현재의 사천 바다는 하나로 뒤섞입니다. 이 시는 사천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되, 시간을 가두고 다시 해방하는 '호리병'의 메타포를 통해 독자들을 역사의 파동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

결국 이 작품은 우리가 딛고 선 일상의 플랫폼 아래에 얼마나 깊은 역사의 바다가 출렁이고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빗줄기에 젖은 선로 끝에서 솟구치는 호리병의 바다는, 박서현 시인이 역사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자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는 푸른 문장입니다. 사천 대방진굴항의 고요한 수면 아래 숨겨진 거북선의 용맹함을 발견하듯,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자신만의 호리병 속 바다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시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