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빌리지 / 박서현
청솔이 달집을 쌓아간다.
열두 달 평안을 짓는 날
그을린 마음을 들춰본다.
삼재가 뜯어 먹은
낡은 속옷과 팥 한 줌 달문에 걸렸다.
잔가지를 지나면
올해는 대운이 온다고
나는
넘을 수 없는 문턱에서 깊은 달무리를 세어 본다.
한때
프라하의 벙거지 모자가
달빛 스민
광장 어귀 벤치에 앉아 시노래를 마시게 하고
K발라드를 빠져나오면
꽹과리 소리에
창이 두 눈을 열고
청솔빌리지로 피어오른다
대보름이 달집에 등불을 내거는
[에세이] 달집에 걸린 벙거지 모자, 청솔빌리지의 보름달
정월 대보름, 마을 어귀에 거대한 달집이 솟아오르면 시간은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생나무 가지가 뿜어내는 매운 연기는 지난 일 년간 우리 마음 구석구석에 들러붙었던 그을음을 닦아내는 성스러운 목욕과 같다. 박서현 시인의 시 「청솔빌리지」를 읽으며, 나는 우리가 태우는 것이 단지 마른 나뭇가지가 아니라, 어쩌면 삼재(三災)가 갉아먹은 남루한 기억의 조각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 속에서 ‘청솔’은 정성스레 달집을 쌓아 올린다. 그것은 단순히 민속 행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아니다. 열두 달의 평안을 비는 간절한 설계이자, 낡은 속옷과 팥 한 줌에 실어 보낼 액운의 작별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넘을 수 없는 문턱 앞에서 서성인다. 대운(大運)이 온다는 덕담을 등 뒤로 하고, 깊게 번지는 달무리를 세며 내면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시간. 그 지점에서 시는 놀랍게도 경남의 어느 마을을 벗어나 먼 이국땅 프라하의 광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체코 프라하의 붉은 지붕들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 때,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여행자는 벤치에 앉아 ‘시노래’를 마신다. 낯선 곳에서 듣는 K발라드는 향수를 자극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고독을 완성하는 선율이 된다. 프라하의 광장과 우리네 청솔빌리지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달빛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연결되어 있다. 고향에서 타오르는 달집의 불꽃이 프라하의 차가운 벤치를 데우고, 이국에서 마신 시노래의 향기가 꽹과리 소리를 타고 다시 고향의 창가로 돌아오는 것이다.
꽹과리 소리는 잠든 영혼을 깨우는 신호다. 그 소리에 맞춰 ‘창(窓)’이 두 눈을 뜨면, 비로소 ‘청솔빌리지’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하나의 생명체로 피어오른다. 현대적인 이름의 ‘빌리지’와 전통적인 ‘달집’의 만남은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콘크리트 숲 위로 뜨는 보름달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위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달집에 등불을 내걸며 시를 마무리한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마음의 문턱을 넘지 못해 주저앉은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이다. 그을린 마음을 들춰보고, 낡은 것을 태우며, 다시 새달을 맞이하는 과정. 이는 20년 넘게 글을 써 내려온 문학인의 삶과도 닮아 있다. 수많은 문장을 쌓아 올리고, 때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태워내며, 독자의 가슴 속에 한 등불을 내거는 행위가 바로 문학이 아니겠는가.
오늘 밤, 우리 각자의 ‘청솔빌리지’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뜰 것이다. 누군가는 프라하의 벙거지 모자를 추억할 것이고, 누군가는 삼재의 흔적을 태우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달집태우기의 연기가 하늘로 높이 솟구칠 때, 우리의 고단했던 삶도 한 뼘쯤은 가벼워진다는 사실이다. 꽹과리 소리가 멈추고 보름달이 중천에 걸리면, 우리는 다시 힘차게 대운의 문턱을 넘어설 준비를 마친다. 대보름의 등불은 이미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