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송은의 벽화묘
"석양에 사립문 닫아 놓아 꽃잎은 쌓이는데"
벽화에서
낡은 사립문을 연다.
야산의 봉분이
송계에 깃들었다
끈 부려놓은 어미소 솔향을 뜯고
납작한 철부지들은
자치기와 숨바꼭질로 비밀을 거스른다
장맛비에 캄캄한 봉분
그 속에
멎어버린 물결의 기억
옛터에 돌덮개를 젖히니
첩첩 타임 속 예복은
세상 밖의 은은한 캡슐이었다
송은 박익 벽화묘
이야깃길로 피어나는 한 땀 한 땀 보물꽃
숨결이 다가와
뒷덜미를 덥석 움켜쥔다
[에세이] 시간의 빗장을 열다: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에서 만난 타임캡슐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야트막한 산자락을 등지고 앉은 송은 박익(松隱 朴翊, 1332~1398)의 벽화묘(보물 제1147호)는 단순한 무덤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려 말 조선 초라는 격동의 시대를 고스란히 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타임캡슐'입니다.
송은 박익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하여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 한 분입니다. 그의 절개와 학문은 후대에 길이 남았고, 그의 묘소는 당대의 생활상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처럼, "석양에 사립문 닫아 놓아 꽃잎은 쌓이는데"라는 구절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벽화묘의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돌로 쌓아 만든 묘실 안으로 들어서면, 600여 년 전의 시간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사면의 벽과 천장에는 당시의 풍속과 의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합니다.
벽화는 소박하지만 세련된 필치로 당대의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끈을 풀어놓은 어미 소가 솔향을 뜯고, 아이들이 자치기와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듯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장맛비에 캄캄한 봉분 속에 멎어버린 물결의 기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엄숙하게 상기시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봉분의 돌덮개를 젖혔을 때 드러난 '예복'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예복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은은한 빛을 발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옷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숨결과 정신이 담긴 '은은한 캡슐'입니다.
시인은 이 예복을 '이야깃길로 피어나는 한 땀 한 땀 보물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우리가 잊고 지냈던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전해주는 선물입니다. 벽화묘 앞에 서면, 시대를 초월한 거대한 시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 숨결은 우리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 신비로운 공간이자, 우리가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되돌아보는 거울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600여 년 전의 시간을 만나고,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며,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입니다.